박물학 이야기 └세계사의 장

루브르 박물관, 대영 박물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유명한 박물관들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박물관 혹은 박물학이라는 학문이 언제부터 시작했는 지 아십니까?
저도 관련해서 깊이 배운 건 아니지만, 아는 정도만 정리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박물학은 서구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초창기 '모은다'는 의미에선 동양이나 서양이나 비슷했지만, 동양은 소유의 개념만 두고 전시의 개념을 보이는 데까지 발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이야기는 서양 중심적으로 하겠습니다.


고대에는 이렇다할 박물관이랄 게 없었습니다.
돈 많은 상인이나 귀족들이 정복지나 먼 나라에서 입수한 귀금속과 석상, 서적, 토산품을 제 집에 치장하고 쌓아두고 친지들에게 구경시키는 게 고작이었죠.

사실 이런 건 인테리어 관련으로 봐야 하겠지만, 모으고 전시한다는 의미에서 박물학의 시작으로 봐줄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그리스 마니아들이 많았습니다.
원래 이탈리아 반도가 마그나 그라키아... 그리스 식민 도시들이 일찍부터 들어선 곳이었기에 문화적으로 지지를 받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그리스 '빠'로는 네로 황제가 있습니다.


하악하악... 나의 그리스는 우월하다능...
(이미지 출처 : 피터스 작 '원형경기장의 네로')


그래서 로마는 건축이나 미술에 그리스 양식을 많이 도입하였고, 부유층들은 그리스에서 들여온 신상과 미술품, 직조물을 집에 진열하고 장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습니다.(이러한 그리스에 대한 로마인들의 사랑은 후대 비잔티움으로의 천도와 동로마 제국 성립에 영향을 끼칩니다.)

하지만 마이너들도 있었죠.

그리스 마니아들이 난무하는 로마에서도 소아시아나, 이집트, 갈리아쪽 전리품과 산물을 챙기고 그쪽 신을 숭배하면서 신상을 전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그곳을 원정한 장군들이나 총독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전래됩니다.
처음에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제국 내에 있는 여러 가지 종교 중의 하나(특이하게도 유일신앙인...)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생활이 힘들어지고, 제국이 흔들흔들 하자 로마인들도 메시아를 찾게 되었죠.

갈수록 로마 내에 기독교 신자들이 급증(아울러 순교자도...)하고, 심지어 귀족들 사이에서도 교인이 나타납니다.
그러다 5세기에 정식적으로 공인받게 되고, 마침내 국교로 인정받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역사적인 승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이후 로마의 영내에서 다신교는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고, 관련한 유물들도 이단이라는 이유로 파괴됩니다.(그리고 로마는 점점 망해갑니다...)


이봐, 콘스탄티누스 아저씨. 댁이랑 테오도시우스 1세가 얼마나 민폐 끼치는 결정을 했는 지 알고 있나?


훈족의 등장과 게르만 러쉬 이후 서로마가 멸망했고, 중세 시대가 되었습니다.

유럽의 중세는 북구에선 노르만들이, 남쪽에선 이슬람들이, 동쪽에선 슬라브와 동방 유목기마민족들이 설치고 다녔던 살벌한 시대였습니다.

더구나 유럽 세계를 위협하는 외래세력과 싸움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치열한 전쟁과 다툼이 있었지요.(강력한 왕권이 확립되기 전, 부족단위로 벌어지던 다툼이 오늘날 한국 장르소설 계에서 '영지물'이라 불리는 소재가 되었습니다.)

이 험악한 중세 시대를 대변하는 것은 메시아를 갈망하는 기독교와 높고 튼튼한 성곽이었습니다.


이런 척박한 시대였기에 박물학은 딱히 말할 것이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영주나 귀족들이 전공품 긁어 모아 진열할 돈도 없었거니와,
괜히 밀레 섬의 비너스상 같은 걸 예쁘다고 갖다 놓다간 신부님에게 '너님 이단을 섬기다 파문당하고 싶나요? 불에 한 번 굽혀 볼래요?'...라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습니다.

그나마 있던 것도 이단이라며 때려부수던 시대였고, 동로마에선 성상 파괴령까지 내려져 있었습니다.(문화재 보호 개념이 매우 빈약하다 하겠습니다.)

이런 걸 전시할 여유도 없었고, 용납도 안 되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수도원과 교회를 중심으로 박물이 연명해갔던 것입니다.

이 시대 수도사들과 신부들이 끌어모은 박물들은 대개 진기한 물건이나 성경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타조알을 어디서 구해와서 그리핀의 알이다...라고 신자들을 속여먹기도 했고...--;;;
작은 원숭이의 뼈를 소인이나 요정의 뼈라고 속여먹기도 했습니다.
또 공룡 화석을 어디서 줏어와서는 노아의 방주 시절, 방주 못탄 짐승의 뼈...라고 주장하기도 했지요.(근데 어떤 동물의 뼈인지 몰라 매우 난감해 했다고 합니다.)

이때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성해포.
예수님 시신을 덮던 천인데 예수님 얼굴이 남았다는 유명한 물건입니다.
여러 가지 성해포들이 있었고, 그중 토리노 성당의 성해포가 유력한 진뭎으로 손꼽혀 2번이나 검증을 거쳤습니다만...
결국 이것은 후대의 현대과학 앞에서 중세 사기극으로 드러나고 말았지요.(시신을 천으로 둘러 싸버리면 얼굴이 반듯하게 천에 찍힐 수가 없었기에 가짜로 판명났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기성 짙은 물건들도 포교나 선교의 수단으로 끌어모아서 진열한 수도원과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이럴 수 밖에 없던 것은 기독교 사회라고 하지만 유럽의 외각에는 여전히 전통 신앙이 숭배되고 있었고, 심지어 농촌에서도 옛 신앙과 전설들이 믿어지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죠.(결국 포기한 성직자들은 이단의 신들을 그 지역의 '성자'로 꾸며 흡수합니다.)

가짜라고 하지만 포교에 도움이 되고, 후손들의 관광 사업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중세가 저물고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박물학은 오랜 어둠속에서 기지개를 켭니다.

십자군전쟁으로 기독교의 권위가 추락하고, 중세 사회가 흔들리자 동방 무역으로 돈을 번 상인들과 국왕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부유해진 이들은 보다 여유가 생기게 되었고, 동방에서 보았던 화려한 문화에 심취하여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장식에 열을 올립니다.

당연히 소품으로서 박물이 주목을 받게 되었고, 박물들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들까지 생겼습니다. 이들은 중동이나 아프리카 루트를 통해 별에 별 것을 다 수입했지요.(물론 개중에 가짜도 꽤 많았습니다)

어떤 가게는 이런 박물을 전시하고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켜주며 돈을 받기도 했습니다.
집시들의 유랑극단이나 서커스단에서도 이런 박물들을 가지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관람료를 받았지요.(물론 마녀사냥이 활발하던 시절이기에 조심스럽게 장사해야 했습니다.)


이 시절의 박물이 예전 시대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단지 재력을 뽐내기 위해서 진열하는 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고대 문화 부흥운동 시기였기 때문에 학문적, 예술적 연구를 위해서 박물들을 끌어모은 경우도 상당했습니다.
또 연금술을 연구하거나 터무니 없지만 흑마법같은 것을 몰래 연구할 때도 관련 도구들을 박물의 양식으로 끌어모으기도 했습니다.(걸릴 경우 뒤탈이 컸지요)



르네상스를 넘어 시대가 더 지나고 역사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면서 박물학은 발굴학과 만나며 더욱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절의 박물은 여전히 진열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고, 발굴은 무척이나 험악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의 경우는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학자들을 데리고 에트루리아 유적을 발굴했습니다.

난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이집트에도 학자들을 데리고 갔어. 가서 스핑크스 코도 뭉게 놓았지. 


그러나 발굴 목적은 매우 불순했지요. 막무가내로 유적을 파헤친 다음 금붙이를 제외한 도자기나 기타 유물은 쓰레기로 분류해서 파괴했습니다.
심지어 금붙이의 일부도 녹여져 프랑스 정부의 금괴로 이용되기도 했다는 군요.(오늘날 에트루리아 관련 연구가 지지부진 한 이유도 다 코르시카 촌놈 탓입니다)

이러한 무대포 발굴은 19세기까지 계속 됩니다. 트로이를 발굴한 슐레이만의 경우도 거의 도굴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하지요.(그래서 터키 정부는 관련 유물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험악하게 시작한 발굴학 덕분에 박물학은 조금씩 모양새를 갖추어 가기 시작합니다.(출토되는 유물이 늘어간 덕분에...)

18세기 프랑스에서 백과전서가 나온 이후, 사람들은 여러 방면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전시'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여기 저기서  박물관이라 할만한 크고 작은 시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지요.


박물관들이 본격적으로 거대화 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때 부터입니다.
돈 많은 귀족이나 재력가들이 죽으면서 자신이 소유한 박물들을 사회에 기증하여 사람들에게 보게 하도록 하면서 제대로 된 박물관들이 등장한 것이지요.

이렇게 박물관을 만든 이유는 자신의 이름이나 가문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특히 신흥 자본가들의 경우는 자신들의 위신과 명성을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대두되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박물관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지요.(조상의 위엄과 자국의 우월함을 알리기 위해서...)

박물관들은 유럽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경영이 악랄화하면서 더욱 커져갔습니다.

훔쳐간 거 내놔, 이 바게트 생퀴들아!


대표적인 것이 대영박물관과 루브르박물관이이었고, 왜놈들도 못 된 것을 배워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화재를 약탈해갔습니다.

이렇게 일본이 약탈해 간 문화재들 중에는 패전이 되면서 섬으로 옮겨놓지 못하고 우리 나라에 남겨 두고 간 것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국립박물관 지하에는 반환하기도 (아깝고), 전시하기도 난감한 중국 유물들도 제법 있다고 합니다.


덧글

  • 들꽃향기 2009/12/30 15:28 #

    근대시기에 들어서 박물관이 '소유'의 개념과 맞줄렸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겠죠. 그리고 그 '소유'가 금전적으로 함부로 거래될 수 없는 물건이라는 '권위-아우라'를 부여 받아 '박물관 자체'의 위상이 생겼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비근한 예로, 중세 시대라면 성 마가의 유해가 이집트 수도원에서 매각되어 베네치아로 옳겨지는 데에는 별다른 도덕적, 사회적 문제가 없었지만, 박물관이 일단 사들이든 발굴하든 간에 소장한 유물이 '거래'의 대상으로 고려되기에는 힘든 그런 '위상'이 부여된 것이죠.
  • 들꽃향기 2009/12/30 15:29 #

    그리고 피터 흄커크 역시 중앙아시아 연구를 위해서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서울'을 언급하고 잇기도 하죠 ^^; 예전에 박물관 수장고에 중앙아시아 유물중 하나로, 고문서를 재활용한 '종이그릇'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해체하여 본래의 문서로 되돌릴 기술이 없어, 그대로 계류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 초효 2009/12/30 17:09 #

    그런 일도 있었군요...
  • 백범 2009/12/30 16:26 #

    중간부분 피터스의 네로 그림의 얼굴하고, 그 아래에 친절하게도 mr 나폴레옹의 그림을 걸어놓으셨는데...
    피터스의 네로 그림이 어떻게 나폴레옹의 얼굴과 그렇게 유사할수 있던지??? 나만의 착각인지???
  • 초효 2009/12/30 17:10 #

    그러고 보니 비슷하네요. --;;;
  • hyjoon 2009/12/30 22:39 #

    쩝........저것과 관련해서 [루브르는 프랑스 박물관인가]라는 책을 중학교 때 읽었던 생각이 나는군요.....
    온 김에 좋은 글 읽었습니다. 링크 신고합니다^^
  • 초효 2009/12/31 14:38 #

    제국주의 한 나라 치고 박물관에 자기나라 유산 많은 나라 없지요.
  • 꽃가루노숙자 2009/12/31 13:56 #

    프랑스라... 독일에게서 약탈된 물건 돌려받고 우리나라에서 약탈해간 물건은 안 돌려준다고 똥배짱 부린다죠?
  • 초효 2009/12/31 14:38 #

    오죽하면 유럽짱깨라 부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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